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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가 자신의 책상 앞 철제 의자에 앉은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남자는 마치 록 음악을 하는 가수처럼 등까지 길게 기른 생머리에 검은 도복 차림이다. 턱 주위론 희끗히끗한 수염이 무성하게 자라 있고, 두 눈은 만개한 목련처럼 부리부리하다. 53세의 검도 사범으로 남자는 피고발인 신분이다. 관내 중학교에 재학 중인 한 남학생의 부모가 남자를 폭행 및 폭언, 협박 혐의로 고소했다. 그렇다고 아이가 다친 것은 아니고 그저 남자가 멱살을 잡은 채 몇 번 흔들었을 뿐이다. 형사는 화해를 시키려고 하는데 남자는 완강하다. 소녀시대의 태연 양에 대해 예전부터 험담을 많이 한 아이를 용서할 수 없었으며, 화해하거나 사과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아니, 선생님. 이게 그렇게까지 갈 사안도 아니고…… 서로 좋게 좋게…… .” "아니죠. 그러면 누굴 사랑하는 게 아니죠. 사랑이 합의될 수 있는 거던가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두 눈을 감았다. 최 형사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노트북 전원을 켰다. 봄이니까. 봄이니까. 최 형사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짜 사랑은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창밖에선 또 한 번 난분분,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24쪽) 단편소설보다 훨씬 짧은, 손바닥소설이리고 해야 하나, 원고지 20매 분량도 안 될 이야기 40편이 묶여 있다. 첫 이야기는 「벚꽃 흩날리는 이유」로 인용문은 끝부분이다. 최 형사는 주말에 아내와 함께 하동 쌍계사라도 다녀올까 눈을 감고 그런 생각을 하다 사건만 일어나지 않으면 아내와 함께 십리 법꽃길을 걸어볼 수도 있겠다 여기지만 맞닥뜨린 현실은 걸그룹의 멤버를 열렬히 사랑하는 50대 남자의 조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그 다음 이야기는 대학을 졸업한 뒤 계속되는 취업 낙방으로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변해가는 대학 동기와 얽힌 「낮은 곳으로 임하라」이다. 준수는 강원도를 향하는 내내 말없이, 어쩐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게 단순히 우리 미취업자들의 일상 표정이라고만 생각했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과 땀에서 배우라는 말,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갔고, 결국은 지금 준수가 짓고 있는 저 표정, 그것이 평상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나도 눈높이를 좀 낮추고 취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된 게 이놈의 나라는 한번 눈높이를 낮추면 영원히 그 눈높이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25-26쪽) 소설은 대개 평범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어찌할 수 없는 희비극을 다룬다.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난감함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이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공감이 간다. 태어나서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여자 친구를 사귀어보지 못한 ‘그’가 동물원에서 한 첫 데이트의 낭패(「동물원의 연인」), 스물두 살 백수 세 명이 해수욕도 하고 여대생 헌팅도 하려고 동해안으로 떠났으나 겪게 되는 고생(「비치보이스」), 고속도로 ‘졸음 쉼터’에서 자살을 기도 중인 ‘내’게 트럭 기사가 자꾸 개입하여 일으키는 방해(「미드나잇 하이웨이」), 배달 사원의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지한 아파트에서 만난 예외적 인간의 예의(「아파트먼트 셰르파」) 같은 이야기들이 마음에 와 닿는다.
재기 넘치는 문체, 매력적인 캐릭터, 시대를 포착하는 날렵한 서사웃음과 눈물의 절묘한 만남, 작가 이기호의 짧은 소설 40편 2000년대 문학이 선사하는 여러 유쾌함들 중에서도 가장 ‘개념 있는’ 유쾌함 중의 하나(문학평론가 신형철) 웃고 싶은가, 울고 싶은가, 그럼 ‘이기호’를 읽으면 된다(소설가 박범신) 이기호의 소설에는 심장 박동 소리가 난다(시인 함민복) 그럴싸한 포장 없이 능란한 거짓말 없이 우직하게도 이야기꾼의 행보를 이어왔다. 등단 15년이 넘었음에도 어떠한 피로감 없이 소모 없이 새로운 감각의 독보적 이야기꾼이라는 신뢰가 여전하다. 2000년대 등장한 이래 희비극적이라 할 그만의 월드를 축조했던 작가 이기호. 그의 특별한 짧은 소설을 한 권에 담았다.
작가의 말
우리에겐 일 년 누군가에겐 칠 년
벚꽃 흩날리는 이유
낮은 곳으로 임하라
동물원의 연인
타인 바이러스
아내의 방
그녀와 마주한 어느 오후
비치보이스
출마하는 친구에게
미드나잇 하이웨이
내 남편의 이중생활
우리에겐 일 년 누군가에겐 칠 년
제발 연애 좀 해
침대
제사 전야
아아아아
불 켜지는 순간들
달려라 아들
그러게나 말입니다
한밤의 뜀박질
도망자
너는 카프카 나는 야누흐
아파트먼트 셰르파
두고 봐라
말처럼 쉽지 않네
개굴개굴
웃는 신부
아아아아
5월 8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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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말해요
좀 쉬면 안 될까요?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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